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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팬데믹이 찾아오기 직전, 대한민국 열도는 사실 흥분 상태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역사를 써 내려간 지난 2월 9일(미국 현지 시간).
LA 할리우드 돌비 극장(Dolby Theater)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은 한국영화 최초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 영화상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올해 아카데미를 휩쓸었습니다.
최다 수상과 아시아 최초라는 수식어가 더 국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그날.
지난해 5월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필두로 10여 개월 동안 세계를 돌며 기록적인 수상 행진을 이어왔던 <기생충>이 마침내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쥐며 한국영화의 위상을 전 세계로 전파했던 그 순간.
카메라도 없었고, 무대에 선 것도 아니었지만 조용히 자축했던 한 가구 장인이 있었습니다.
박•종•선
기생충 흑백 필름 전격 개봉을 며칠 남겨두었던 4월의 어느 날, 가구장이를 자처하는 가구 예술가인 그를,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에 자리 잡은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습니다.

반갑습니다. 영화 개봉으로 더불어 주목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주춤하지요? 참 아쉽게 되었어요. 또 다른 한류로 세계를 흔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강원도로서도 특히 이곳 때문에 못내 안타까워요.
예. 지난해 개봉한 이후로 많은 곳에서 관심을 보였어요. 코로나 이후로는 아무래도 잠잠해졌지요.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아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언론들은 여전히 연락이 와서 인터뷰도 하고 합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감독이 가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는 바를 누구나 알아차릴 정도로 가구가 차지한 비중이 꽤 높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시나리오에 맞춰 사전 제작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연결된 건지 궁금하네요.
인연은 무슨요.. 영화계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불현듯 어떻게 알고 촬영 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몇 년 전 발간한 모음집(BAHK JONG SUN FURNITURE TRANS 2005~2017. 필자의 생각에는 작업 과정의 처음부터 결과물까지 공개하는 것을 통해 가구를 대하는 박•종•선의 자세를 보여주고자 하는 화보집)을 감독이 봤다더군요. 봉준호 감독은 만나지 못했고 미술 감독과는 여러 차례 만났죠. 구체적이고 세밀한 요구사항들이 있어서 상당히 오래 걸렸어요. 예를 들자면 ‘거실 테이블에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공간을 감안한 테이블로 240M로 만들어 달라’는 식으로 구체적이었지요.
사실, 영화를 보고 저도 놀랐습니다. 가구가 중요하다고 들었고 그래서 수락했긴 했지만 의외로 많이 나와서 놀랐죠. 촬영 현장에도 확인 차 가보기도 했지만 그 정도 일 줄은 몰랐거든요.

영화 내내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했던 그 테이블요? 
네, 네, 맞아요. 지금 앉아 있는 이 테이블이 거실 식탁이었고요. 저기 등도,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도, 저쪽 스탠드도, 안쪽 체리목으로 만든 사운드 백도 출연했네요. 거실 탁자는 3개를 만들었는데 뉴욕의 갤러리에 하나 가져가서 영화 개봉 후 월스트리트 저널에 올렸더라고요. 실제 사용된 이 테이블은 프랑스 박물관에 가는 걸로 확정이고요, 의자는 이제 2개만 남았는 데 이 건 제가 기념으로 보관하려고요.

완전 기생충 전시관이네요. 그런데 전부 나무네요.

원주 스튜디오의 모습입니다.

네. 소재 제한은 없으니까 금속도 하고 콘크리트를 소재로 쓰기도 하지만 주로 나무를 합니다. 그림이든, 건축이든, 가구든, 조각이든, 대부분 처음에는 화려해지고 꾸며내게 되지요. 보여주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넘치니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이제는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뭐든 덜어내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더군요. 지워내고 또다시 지워내고……. 뭐랄까……. 본질만 남겨놓는 것에 천착을 하게 된 달까.

본질만 남는 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말하자면, 내가 앉을 수 있는 높이와 등을 기댈 수 있는 정도의 안락감. 그러면서 가장 가벼운 상태를 말하는 거죠. 골격을 최소화시켜서요.
요즘은 갈수록 디자인이 간결해지는 추세예요. 스칸디나비아 쪽은 단순함의 정수라고들 하거든요.
물론, 저도 처음에는 의자를 저렇게 가늘게 하지 않았지요.
결국 그 물성이 목표하는, 테이블이면 테이블, 식탁이라면 식탁이 가진 본래의 기능에 충실해서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히 없애버리는, 일체의 장식을 경계하는 겁니다. 일테면 재료가 좋은 음식을 만드는 거지요.
오래 한 이들일수록 늘 조선의 목가구를 얘기합니다. 조선의 사랑방 가구는 얼핏 보았을 때는 있는지도 모르는, 없는 것 같은 극한의 무심함을 보여줍니다.  
딱 본질만 남아있는. 그래서 정말 단순해져 있는, 그런 가구예요. 가장 진화된 전형이라는 거죠.
그것을 목표로 삼는 거지요. 지워지지 않는 가구를 만들고 싶으니까요.
소박해서 오히려 격조가 있게 느껴지는, 그런 가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가구를 만들고 싶다라…….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스트레스가 강도가 제법 높을 법도 한데요
스트레스요? 왜요? 그럼 못하지요. 의자 하나, 책상 하나를 만들 때 스스로 좋아서, 창피하지 않은 존재로 남아있게 하고 싶은 건데요. 그게 의외로 쉬울 수 있어요. 영원하다기보다는 없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게 하자는 게 맞겠네요.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자’는 의지를 굳히다 보면 제 태도가 어느 순간 아주 정성스러운 상태가 돼요. 어찌 보면 구도자와 비슷한 상황이랄까요. 선(禪: 되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불교에서 이르는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을 말하는 듯했다)에 이르는 상태와 유사하다 생각합니다.

사유와 철학이 담겨 있는 가구네요. 생각을 옮기는 가구 제작은 힘들 텐데요. 연간 얼마나 만드시나요?
글쎄요, 세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최소한 10개에서 50개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요? 한 달 평균 3개 정도를 작업하는 것 같은데? 저는 미니어처로 사전 작업을 먼저 합니다. 도면이나 그림은 평면의 표현이니까 입체로 구현해 놓으면 실제 제작을 할 때 시간도 단축할 수 있고 좋더라고요(벽면에 걸려있는 그 자체로 전시 코너라 할 만하다)

요즘 말로 최애랄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요?
음.. 2013년 스위스 전시회에 출품했던 가구요. 파티션 겸 캐비닛인데 30개가 넘는 각각의 파티션들이 다 분해가 됩니다. 깊이가 높이 187cm, 폭은 40cm, 넓이가 3M 24cm지만 실제로는 사용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최장 길이가 달라져요. 펼쳐서 최대 12M까지 가능하죠. 쓰는 사람의 몫인 거죠.

3M짜리가 최대 12M가 된다고요?늘렸다 줄였다가 되는 가구라니 매직이네요. 출시했을 당시에 화제를 모았겠습니다. 지금 많이 활용되는 디자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구매자가 애장품으로 사용해 준다면 가장 기쁜 일이지요. 당시 출품했던 가구는 휴고 보스 대표 자택 거실에 있어요. 직접 전화를 걸어 올 정도로 만족해하니까 참 좋지요. 만든 사람으로서는. 시간이 흘러서 일반 생활 가구 디자인에 편입되고, 보편적이지 않아서 감동이 있으면서, 결국 주변에 영향을 조금씩 주게 되는, 지금은 그게 제가 해야 할 역할이지 싶습니다. 예전에 조선시대에 책을 보관하던 가구인 책함을 보고 나름대로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수납공간으로 만들었거든요. 바로 이런 식으로 후세에도 남아있게 되는 거지요.

작가 박종선의 지금을 있게 한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올해로 23년이거든요.
처음부터 바위를 굴리기는 어렵잖아요. 저 역시 중간에 포기를 하려던 시기도 있었고요. 시작 당시에는 목공들이 줄어드는 상황이었고 또, 창작 가구를 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서 롤 모델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들 해외로 나갔지요. 저도 너무 힘들어서 2005년도에 정리할 겸해서 ‘여행이나 다녀오자’ 그런 마음으로 유럽을 갔는데 오히려 거기서 다시 시작해 볼 힘을 얻고 돌아와서 원주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었죠. 가구로 전시를 한다는 자체가 파격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가 변곡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로 몇 년 동안 매년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전시회를 열고, 어떤 해는 3번까지도 했죠. 정말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었죠. 미쳐있었던 거죠. 정말로, 철저하게. 그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니까 유명 갤러리에서 소속 제의를 받게 되었죠. 그때 전격적으로 해외 전시회에 참여할 문이 열렸고 지금까지 왔네요.

이제, 앞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으실까요?   
최근 몇 년간 창작 가구를 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늘어나서 지금 서울에만 사설 공방이 3백 개가 넘습니다. 생계 유지가 필수이니 창업과 동시에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적자가 쌓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건강하지 않은 구조가 생성되었어요.
힘들어진 후배들이 종종 여기까지 찾아옵니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생업과 창작이 동시에 가능한 교육과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연대, 혹은 연계를 통해 또 다른 무엇을 창출할 수 있는 일종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같은 그런 공간과 지역과 상생하는 시스템으로 허브 콘텐츠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일테면 가구 학교 같은. 장인들이 길러지면 창작하고 싶은 이들은 그들대로, 생산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또 그들에게 맞는, 가구와 박종선 퍼니처를 브랜딩 해서 조금 더 저가로 좋은 가구를 만들어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는 그렇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후 그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알려진 아사카와 다쿠미의 글중 일부를 보내왔습니다. 아마도 그가 걸어온 길을, 또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말해준 문장 인 듯싶어 첨언하는 것으로 긴 인터뷰를 마감합니다.

‘어떤 일이건 평생 싫증 내지 않고, 한 가지 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도 그런 사람들의 은혜를 입은 점이 많을 것이다, 단 자본에 맞서는 노동도 아니고 자본이 있어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일, 또 적어도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인간에게 평안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글: 조은노 강원도청 대변인실
사진: 최용주 동트는 강원 객원 작가
기생충 관련 사진: CJ ENM & Barunson 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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