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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일. 
이날, 잘 드러나지 않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폐광지역’이라는 단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석탄산업 전환 지역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죠. 
한국전쟁 이후 한국경제의 부흥을 일으키는 기간 사업의 하나였던 석탄산업이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 이후 피폐한 탄광 지역의 경제진흥을 위하여 1995년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후에 이 지역들을 불러왔던 이름이기도 한데요 강원특별자치도에는 유독 많았죠. 
해외에도 이들과 무관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잘살아보자!’라는 구호 아래, 1963년부터 독일로 파송한 광부 7936명, 간호사 10,500명이 바로 그들인데요, 당시 독일인에게 기피 업종으로 분류된 광부와 간호사로서 취업한 일이었습니다. 정부가 최초로 시도한 해외 취업 진출이기도 하죠. 
파독 광부·간호사로 불렸던 이들 중에 강원도 출신도 많았습니다. 당시 500명 모집에 4만 5천 명이 지원했다고 하니까요. 현재 70~90대로 파독(독일 파견) 1세대로 불린 이들은 국가 간의 협정으로 해외 진출한 것이지만, 개인이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선택한 모험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죠.
이들 가운에 파독 간호사로 여생을 보내고, 지난해 여름 한국을 방문한 박미령 재독 강원특별자치도민회장을 만나 그동안의 소회를 들어봤습니다. 

독일 파독 기념회관에 전시된 사진들


Q 하나.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나요?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어머니를 뵈러 매년 와요. 퇴직하고부터죠. 올해 8월 2일(2025년 10월 1일 인터뷰 당시)에 재독 도민회 총회가 있었는데, 회장을 맡게 되어서 회원들이 요구한 일이 도청과 협의해야 할 사항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도청까지 오게 되었네요. 이번이 11대인데 사실, 7대 때에도 도민회 대표를 맡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아시다시피 네덜란드나 캐나다, 혹은 미국으로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떠나신 분들도 꽤 있어요. 
또 연세들도 많잖아요? 대부분 6·70년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로서 현재는 현업에서 물러났지만, 고향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사실, 광부만 아니라 1966년부터 간호사도 여러 차례에 걸쳐 독일로 왔고, 결국 10,300~10,400명에 달하는 간호사가 독일에서 일했었어요. 그런데 광부에 피해 상대적으로 이들에 관한 공헌도가 덜 언급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우리는 항상 고향, 한국을 그리워하고, 방문하고 싶어 하죠. 고국을 떠나 젊은 시절에 한국 경제에 보탬이 되었던 우리들의 고생과 가족에 대한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은 다른 나라의 해외동포와 달리, 특수한 목적에 의해서 해외교민이 되었잖아요. 유학이나 개인의 성취를 위해 해외로 나가거나 이민을 간 사례들과 확연히 다르거든요. 오로지 일하러, 국가에서 선발해서 보낸 일꾼이었죠, 경제성장을 위한. 고국으로 돌아올 날을 정하고 떠난, 소위 외화벌이로 나선 그런 사람들이니까 끈끈한 정은 두텁고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한 그런 교포 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죠. 강원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의 해외동포들 대부분이 청소년 육성사업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청소년 연수 프로그램을 했거든요. 그저 고향을 잊지 못해서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들이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실현해 보도록 노력하려는 거지요.
 

박 회장은 2026년 4월 25일 재독한인문화회관에서 재독 강원도특별자치도민회(이하 강원도민회) 제19회 도민의 날 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Q 둘. 독일 파견 1세대로서 타국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많았을 덴테요.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재독 동포사회는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에 뿌리를 내리는 데 역할이 매우 컸어요. 특히 간호사들은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자녀교육과 사회생활을 헌신적으로 감당했어요. 한국인들이 자녀 교육에 철두철미한 특성이 어디 가겠어요? 독일 현지 맞춤이다 보니 방식은 달랐지만, 기본 방향은 같으니까 자식 교육에 성심을 다했겠죠? 당연히 2세들이 독일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죠. 또  재독 동포들은 고국 사랑도, 수구초심도 강하니까 수백 명이 모여 대화하고 망향가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독일 현지에 건설했어요. 파독 1세대와 재독 동포의 상징적인 광장이며 기념인 만남의 광장이자 대화의 광장으로 불리는데, 자부심의 결정체기도 하죠. 바로 라인루르 광역도시권 지역인 에센에 건립한 파독 광부 기념회관이자 재독한인문화회관이에요. 여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담긴 자료실과 영상기록물이 전시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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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월급을 받으면 최소 생활비만 남기도 전부 고국으로 보냈거든요. 가족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요. 동생들 학비, 생활비로 보낸 거죠.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시에 독일에서 받은 첫 월급이 9백 몇십 마르크 (Mark)였어요. 이게 환율로 계산하면 한국에서 받는 월급의 3배가 넘었어요. 그때 50마르크만 두고, 950마르크를 한국에 다 보냈어요. 정말 필요한 것만 사서 쓰고 전부 고국으로 송금한 거죠. 가족들에게로. 모두 다 같았어요. 막상 독일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하려니까 정말 집기하나 마련할 돈이 없는 거죠. 정말 눈물 없이는 그때 이야기를 못해요. 다들 이런 이야기들이 인생사에 담겨있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잖아요. 경제 대국이라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현상이니까요. 지금이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던 이런 일들이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Q 셋. 재독 강원 특별차지 도민회장으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요? 

강원도민회는 2003년 3월에 구성이 됐어요. 그때 가장 첫 번째로 뜻을 모은 사업이 바로 고향 후배들을 초청하는 거였어요. 당시 남편이 초대회장이었어요(남편 이유환*씨는 이날도 부부가 같이 도청을 방문했다.)

2025년 10월 1일 도청을 방문한 부부. 같은해 8월 독일 현지에서 열렸던 도민회 총회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90%가 장남, 장녀였거든요. 가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전부 월급을 보내려고 자원해서 온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좋은 곳, 좋은 세상을 보고 사는데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죠. 당시 우리 국력이야 정말 보잘것없었으니까요. 당시에 우리에 관한 기사가 나오고, 모집 공고도 신문으로 할 때니까요. 외화벌이 첨병이다, 뭐 이런 말이 나올 때였거든요. 물론, 2003년도*는 우리가 처음 외국에 나왔을 때와는 달랐지만 1999년에 외환위기가 있었고, 한국 상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형편이 나아졌으니까 홈스테이로 숙박공간을 제공하고 지역에서 뜻있는 선배나 유지분들이 항공권값을 내면 우리가 독일 현지 체류를 책임졌죠. 많을 때는 인원이 34명 정도 됐으니까 재정적으로 부담은 되었지만,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참. 2003년도 첫 사업으로 교육청에서 학생을 추천하고, 도청에서도 지원하고, 또 정선에 카지노가 생기면서 나오는 강원랜드의 수익으로 항공권 비용을 책임져서 학생들이 독일로 견학을 오게 됐죠. 교민들이 너무 좋아했죠. 고향에서 청소년들이 왔으니까요. 16번을 한 것 같아요.

20년 전이니까 쉽지는 않았죠. 더군다나 유럽이었으니까요. 당시 강원도청에서 국제협력관 제도를 운용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어떤 때는 12일간의 일정으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5개국을 방문해서 괴테 생가, 쾰른 대성당, 노트르담 사원 같은 역사문화 탐방을 실시했죠. 우리는 홈스테이를 통해 해외 도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그 학생들이 지금은 사회에서 한몫을 하는 데 아직도 연락이 닿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네들이 "그때 연수가 세상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꿈이 변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가 가장 기뻤던 기억으로 남아있죠.

사진출처 : www.eknews.net 유로 저널 스크린 샷

그때와 지금은 상황은 다르지만, 환경이 어려워서 해외 방문이 어려운 그런 청소년을 초청하는 일을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가능할지는 모르지만요. 또 더 늦기 전에 회원 간 교류도, 국내 도민들과의 교류의 폭도 넓히고도 싶지요. 우리가 매년 한국문화를 보여주는 축제를 열고 있는데 이런 일 하고 있다는 것을 국내에도 알리고 싶고 그렇습니다. 

*재독 강원도민회는 60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현재 600여 명의 강원동포가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23년 3월 25일 ‘재독강원도민회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였으며 이들은 창립 첫해인 2003년 8월에 2003년 영월 연덕분교 학생 6명을 초정, 유럽 견학을 사업을 진행했다. 이후 2004년 모범 청소년 15명을 모집해 7박 8일간 유럽 5개국 연수, 4차 때는 9박 10일, 7차는 청소년 국제화 마인드 함양 국외연수, 2019년까지 16차까지 진행했다. 또한, 매년 2명~4명의 장학생을 선발, 각 개인에게 500유로의 장학금을 전달해 왔다. 특히 2000년대 초, 강원도가 여러 차례 수해로 심각한 피해를 입자, 십시일반 지원금을 모아 2000유로 상당의 모금액을 전달했으며 코로나 시기에도 위로금을 보내기도 했다.

Q 넷. 재외동포로서 K-콘텐츠 시대를  어떻게 느끼시나요?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죠. 앞서 우리가 처음 해외생활 할 당시를 되돌이켜보면 믿을 수 없죠.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해요. 자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k 한류 실제로 그렇게 체감하죠. 남편*이 태권도 사범으로 오래 도장을 운영했거든요, 독일 현지에서. 태권도, 부채춤이 한국의 문화를 상징했는데 이제는 한국인들이, 반가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외국인이 되었음을 체감한달까요. 다만, 한국에 올 때마다 그 위상이 놀랍기도 하면서도, 귀향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경쟁이 너무 심하고 자본의 격차도 심각한 것 같아서요. 아이들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했었는데, 최근에 직업상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겨서 결국 독일인이 되었어요. 한국은 이중 국적이 허락되질 않으니까요, 같은 세대 중에 어떤 분들은 고향 선산에 묻히시는 분도 있고 누군가는 한국에 지인도 없고 선산도 없으니 바다에다 뿌려달라고 하시는 분도 있거든요. 죽어서도 독일에 묻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남편 이유환 씨는 묵호 태생으로 1977년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지만, 바로 다음 해 독일 함(Hamm) 시에 태권도장을 개설해 탄 캐는 광부이자 태권도 사범으로 한때 그로스 마이스터(그랜드 마스터) 리(Lee)라는 닉네임을 가진 독일 태권도계의 대부로 불렸다. 재독 5~6대 태권도회장으로 4년간 태권도계를 이끌기도 했었다고 한다. 강원도 해외 명예 협력관, 1~2대 재독 강원도민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5년에 부인 박미령 씨가 7대 회장으로 추대되자 2017년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4년 강원도를 방문한 재독 교민회원들. 당시 이유환 회장과 부인 박미령씨가 마지막 뒷줄 가운데 자리했다.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2014년에도 교류는 이어지고 있었다.
2025년 6월 27일 김진태 도지사를 단장으로 하는 강원방문단이 재독자치도민회를 찾았다.

 

글 : 조은노
사진 : 강원특별자치도청 대변인실 아카이브&보도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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