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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미술 축제,지역 유산으로 만들다

영화로 꼭 한번 다뤄졌으면 하는 인물이 있어요.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에요.
‘10만 석 가산을 탕진한다’라는 비난에도 일제가 수탈해 가는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죠.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표적인데, 1938년 최초 근대식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이기도 해요.
회화, 도자, 금속공예, 불교 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포함되어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죠. 후손들도 그 뜻을 잘 지켜내어,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는 서울과 대구에 간송미술관을 운영 중입니다.
‘보국’이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립니다.
그는 왜 이렇게 문화재, 무엇보다 미술품을 보전하는 데 전 재산을 쏟아붓고 인생을 바쳤을까요? 미술이, 문화재가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지 일찍이 깨달은 선지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 주류로 등장한 K-한류, K-컬처라는 문화 강국의 흐름은, 이런 분들의 노력 결과물이지 않을까요?
바로 이런 비전으로, 유독 척박한 편인 강원 지역의 미술 시장에서 오랜 세월 미술의 저변확대를 위해 공공 미술 분야라는 한 길을 걸어온 이가 있습니다.
오는 7월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 기획전 ‘시원의 숨결을 따라’ 展에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강원문화재단의 신지희 전문위원을 만나, 큐레이터이자 미술 축제의 기획자로서의 여정을 들어봤습니다.
EPISODE 1. 트리엔날레 : 컬래버로 완성한 문화축제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지난 6월 5일 춘천문화예술회관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못내 쑥스러워하던 그를 붙잡고 대뜸 물었죠.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으라면 무엇이라 답하겠느냐고.
“당연히 강원국제트리엔날레(강원트리엔날레)*죠.”
시작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불릴 만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 그 좋은 작품들과 만들어낸 공간을 유산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자책이 여론으로 형성되면서부터. 유산 사업이자 대안으로 트리엔날레를 기획했다고 해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홍천에서 3년 주기 순회형으로 진행된 국제 시각예술 행사가 그의 기획자 인생에 획을 긋는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2019년 강원작가전으로 강원도 작가분들을 모시고 축제의 포문을 열었고, 이어지는 키즈트리엔날레를 통해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년 차에는 이전의 모든 행사를 총망라하는 국제 전시로 피날레를 장식했죠.”
3년의 여정은 단순히 일회성 축제에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홍천이라는 지역의 공간과 주민의 삶에 변화를 일궈냈죠.
한국전쟁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지난 20년간 굳게 닫혀 방치됐던 탄약정비공장이 ‘문화정비공장’으로 탈바꿈하는 결과를 만들었거든요.
획기적이라는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죠.
이 전시회는 평화라는 상징적 메시지를 세상에 타전했고, 폐교 와동분교는 문화공간이자 주민들의 따뜻한 쉼터로 다시 살아났죠. 덕분에 마을은 생기를 되찾았어요. 와동분교는 행사가 끝난 이후에도 매년 홍천 미술 페스티벌이 열리는 생동감 넘치는 문화 공간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거든요.
공간의 변화가 아닌 ‘사람의 변화’.
그에게는 인생 최고의 레거시가 완성된 순간이었던 거예요.










지역 주민이 조연이 아닌 주인공이 되어 미술 축제를 이어가다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과의 협업을 위해 기획 단계 초반부터 판을 짰어요. 그네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말이죠. 단순히 일회성의 일자리보다는 이 축제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우리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죠. 지금 되돌이켜봐도, 아마도 가장 큰 성과는 이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홍천 트리엔날레에서 그네들은 더 이상 관객이나 조연이 아니게 된 거예요. 사전 교육 프로그램을 거쳐 축제장 내에 카페를 직접 운영했고, 도슨트 교육과정을 이수해 관람객들에게 당당히 작품도 해설했습니다. 또 전시장 지킴이부터 체험 프로그램까지, 축제의 실핏줄 같은 운영을 도맡았어요. 이제 와동분교에서는 매년 미술 축제가 열리고 있죠. 당시 역할을 분담했던 주민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축제를 이끌어가는 주관자이자 주인공이 되었죠.
“최근까지도 홍천에 업무 협의를 하러 가면 주민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곤 합니다. 그분들의 환한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껴요.”
*코로나 시기가 한창이던 2021년에는 따스한 재생(Warm Revitalization)’을 주제로 9월 30일부터 11월 7일까지 사전 예약제와 온라인 관람을 병행했다. 탄약 정비공장, 와동분교, 홍천미술관, 홍천중앙시장 일원에서 39일간 열려 39개국 104팀, 126 작품을 선보였다. 온오프라인 전시로 총 3만여 명이 방문했고, 온라인 영상 노출도 10만 뷰를 기록한 것으로 보도됐다. 강원 트리엔날레는 지역과 함께하는 시각예술 행사로 참여적, 지속적, 공공 예술적 행사 개최를 목표로 강원자치도 18개 시군을 3년 단위로 순회하며 개최, 2024년까지 진행했었다.
EPISODE 2. 전문가의 고집 : 좋아하는 미술, 다들 더 좋아하게





2018 평창동계올림픽 문화 레거시 : 공공 미술 축제를 만들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죠.
어렸을 때부터 그림이 좋았다고 해요.
이화여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홍익대 서양화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미학과에서 공부를 좀 더 합니다.
갤러리에서 경력을 쌓고, 미술 전문 잡지 기자로 일하다가 2014년 (재)강원국제미술전람회민속예술축전조직위원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이 축제가 되는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죠.
2015년 평창비엔날레에서는 행사 운영을 맡았고, 3년 뒤 세계에 한국과 평창을 알렸던 2018 강원국제비엔날레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끝내면서부터 기획자로서 지역에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죠. 이후 강원문화재단 소속으로 강원트리엔날레를 총괄, 국내 최초의 노마딕 시각예술 축제로 주목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어요.
2018 평창동계올림픽 문화 레거시 사업의 하나로 추진한 강원국제예술제(2019년). 강원작가트리엔날레(2019년), 강원키즈트리엔날레(2020년), 강원국제트리엔날레(2021년)를 개최했죠. 첫 개최지였던, 인구 6만 5천여 명에 불과한 홍천군에서 매년 미술 축제가 열리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큰 성공을 거뒀어요.
놀라운 일이죠.
이어 2024 강원청소년동계올림픽 때도 전시 프로그램을 총괄로, 동해를 모티브로 한 ‘바닷가 갤러리’를 선보였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국제 미술계의 경향을 반영한 굵직한 공공 미술 행사와 축제 중심에는 그가 있었습니다.
EPISODE 3.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전시 : ‘누구에게나 내 인생은 다 작품’
올해 그는, 이번 전시에 모든 시간을 쏟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준비 기간은 수개월이었지만, 전시의 진짜 출발점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내 작가들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에,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작가들의 삶을 채록하는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죠.
작가 한 명 한 명을 인터뷰하고, 좌담을 기록해 인터넷에 차곡차곡 업로드해 나간 일련의 시간들, 그 땀방울 맺힌 기록들이 바로 이번 전시의 위대한 모티브가 되었다네요.
“퇴직을 앞두고 기획하게 된 이 <<시원의 숨결을 따라:20인의 강원이야기>>전시는,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의미 부여를 더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지난 3월부터는 주말도 반납한 채 작가들과 수차례 논의를 거듭했죠. 더 많은 분이 오셔서 행사의 숨결을 느끼고 가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담론이나 소위 '사조'가 사라지고, 개별화된다는 현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서사’에 주목했는 데, 각자의 이야기가 곧 역사가 되는 세상이기에, 결국 한 인간의 깊은 내면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정조대왕을 참 좋아합니다. 정조의 그림과 글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의 깊은 생각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요. 고흐 역시 동생 테오와 나누었던 편지가 작품 속에 녹아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기록하고 작품으로 남길 수 있는 기획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회가 적은 지역 미술계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렇게 시작된 작가들의 인생 기록은 뜻밖에도 하나의 종착지로 귀결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공통분모가 바로 ‘고향’이었어요. 지금 살고 있든, 혹은 멀리 떠나 있든, 작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고향이 가장 강력한 창작의 동기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결국 ‘수구초심(首丘初心)’라는 거죠.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예술가들의 영혼의 뿌리 역시 고향을 향해 있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거예요.
시원(始原). 모든 것이 처음 시작된 그 본질의 자리.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그렇게 정해졌던 거죠.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나지막한 질문을 건넵니다.
작품들 사이에 머물며, 채 떠나보내지 못한 당신의 고향을, 그리고 ‘나에게 시작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EPISODE 4.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 ‘도립미술관 건립’과 미술축제의 기획자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무엇을 하려는 지 묻기도 전에, 가장 아쉽고도 간절한 바람이 있다며 '도립미술관 건립'을 꺼내 듭니다.
미술을 사랑하고, 평생을 미술이라는 세계 안에서 큐레이터로, 축제 기획자로 살아왔기에 품을 수 있는 당연하고도 깊은 염원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드물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계속 이어집니다. 평생을 바쳐온 현장에서 이를 외면당하는 예술가를 지켜봐야만 할 때가 기획자로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전시를 기획하면서 강원인의 놀라운 미적 저력을 다시 한번 보았다는 그.
어디에도 없는 투박함, 솔직함, 그리고 뚝심 있는 힘이 바로 강원의 미학임도 발견했다고 강조합니다.
이 위대한 자산이 하루빨리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인식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이제 정든 현장을 떠나 7월이 되면, 남편과 함께 유학 시절의 추억이 서린 영국으로 소중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라는 그.
현역의 역할은 후배 세대에게로 넘기지만, 시각예술가들의 세계관을 글로 짓고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그.
아름다운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약속하는 그.
마무리와 앞으로를 언급하는 언어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한 분위기를 읽습니다. 아마도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요.
앵글에 담긴 전시장에 스며든 그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술관의 기능은 역사의 기록이고 자긍심의 저장고입니다.
공공 예술제는 예산의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업이 아니라.
숫자로 가치 환산을 따지지 않는 무형의 효과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글&사진 : 조은노 강원특별자치도청 대변인실
인터뷰이(interviewee) : 신지희 강원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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